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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의 역사의 대해서 알아보자

by 유익한 내용 2023. 12. 14.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대한민국의 자동차 기업.

현대자동차 그룹의 모체이자 그룹을 대표하는 회사이며 더 나아가 삼성전자, LG전자와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회사다.

역사

쌀가게 "경일상회" 주인이던 아산 정주영일제강점기 1940년 3월에 인수하여 경기도 경성부 아현정(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운영했던 아도써비스 라는 자동차 정비소를 그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정주영은 빨리, 완벽하게 고치고 수리비는 많이 받는 방침으로 사업 성공의 토대를 닥았다. 1940~1942년 당시 조선에서

는 자동차는 극소수의 부유층이나 가지고 탈 수 있는 매우 비싼 사치품이었다. 당시에는 간단한 수리여도 수리일을 

늘려서 공임을 더 받거나 일부러 부실한 수리를 해서 당시 정비소에 찾게 하려는 관행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자동차가 고장나면 차 주인이 발이 묵여 힘들어한다. 그러므로 빨리 차를 고치는 게 고객을 위한

길이다. 라며 수리일은 아무리 큰 고장이라도 무조건 3일 이내, 다시 고장이 나지 않게 완벽하게 수리한다는 기치를

내걸었다. 대신 수리비용은 다른 공장에 비해 3~5배를 받았다. 구러나 위에 언급했듯 자동차는 당시 부유층이나 소유

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고, 이들에게는 그저 수리비 돈 몇푼보다 빨리, 정확하게 수리하는게 더 중요했기 떄문에 비싼

가격에도 순조롭게 사업을 이어나갔다.

 

밤12시까지 작업소에 머물면서 고객들 차를 빨리 빨리 수리했다. 이처럼 빨리 빨리 빠르고, 정확하고 납기 준수 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경영은 순조로워 수익을 많이 냈다.

그러나 초창기의 공장은 25일만에 불타 없어졌다. 새벽에 밤새도록 일을  하고 난 한 공원이 기름투성이 손을 씻기 위해

시너로 불을 지펴 물을 데우다가 그만 잘못해 불이 나고 말았다. 그 이후 아도써비스는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의 

조그만한 공터에서 다시 공장을 세워 운영했다. 다행히도 그동안의 신뢰가 있었기에 고객들이 다시 찾아와 줬으며

상당히 흥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까지 일어나자 다시 사업이 어려웠다. 결국 일제는 기업 통제 정책인 기업정비령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

종로 5가에 있는 일진공작회로 정주영이 소유하던 아도써비스가 강제 흡수 합병되었다. 정주영은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을 그만두었다. 이후 아도써비스를 정리한 자금으로 트럭을 구입하여 석탄운반업을 하였으며, 해방 이후

중구 초동의 적산대지 등을 불하받아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설립 직후에는 미군 병기창에서 

하청을 주로 받았으나 점점 수요가 늘었고, 이 회사를 현대토건사가 흡수해서 현대건설로 변모한다.

 

초기

현대자동차의 공식적인 역사는 1967년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면서부터 시작한다. 1967년 12월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이 정식으로 회사를 설립하여 당시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포드 모터 컴퍼니와 기술제휴를 체결했으나 

포드와 소형차에 대한 협력에 문제가 생겨서 독자 모델 개발을 추진했지만 마땅한 기술제휴 회사를 구하지 못했다.

1970년대에 중후반에는 메르세데스-벤츠와도 기술제휴를 맺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미쓰비시 자동차에서 소형차 개발을 도와주겠다고 1973년 기술제휴를 체결하며 차체와 엔진

변속기에 대한 생산기술을 얻었고, 1976년 1월 포니를 판매하게 되었다.

1974년 현대자동차써비스를 세워 자동차 수리사업에도 진출했다.

이후 독자적인 모델의 생산을 위하여 자체개발을 시작했으며,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 브리티시 레일랜드 부사장이었던

조지 턴불을 영입하고 1974년 7월부터 1억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연산 56,000대 규모의 종합 자동차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같은 해엔 한국증권거래소에 주식상장했다.

 

1975년 울산공장 준공 후 1976년 1월 대한민국 자동차공업의 자립화를 선언한 고유 모델인 포니를 시작으로 독자모델

생산을 시작하여 쏘나타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최대 자동차 기업으로 떠올랐고, 아시아에서 2번째로, 독자 자동차

모델 생산국이 되었다.

 

현대자동차그룹

1999년 현대정공 자동차부문과 현대자동차써비스를 합병했고, 같은 해 2002 한일월드컵 및 유로 2000 후원사로 선정돼

세계적으로 위상을 드높였다. 2000년 8월 다른 계열사 9개와 함께 현대그룹에서 분리되어 현재의 현대자동차그룹

형성하였다. 본사 등기도 그 해 12월에 양재동으로 이전하면서 현대그룹과 분리되었다.

2001년 7월, 현대자동차와 다임러AG 가 상용차 부문에서 합작을 추진해 다임러 현대 상용차 주식회사를 합자법인으로

설립했다. 그러나 다임러 AG와 현대자동차의 의견 차이로 인해 3년도 채 못가서 2004년에 갈라섰고, 주식회사 법인은

청산 및 합작이 무산되었다.

2002년 중국 베이징기차와 합작해 베이징현대를 세웠고, 2004년 현대상용엔진을 합병한 후 이듬해 미국 엘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공장을 세워 북미 현지 생산을 재게했다.

2009년 정몽구의 아들인 정의선이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특징

내수 시장에서는 기아를 제외한 나머지 경쟁사 대비 비슷하거나 저렴한 가격에 더 우수한 상품성을 자랑하며 넓은 

실내공간과 풍부한 옵션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