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캐딜락 역사의 대해서 알아보자

by 유익한 내용 2024. 1. 3.

제너럴 모터스 산하의 프리미엄 브랜드이자 링컨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의 양대 산맥이다.

오늘은 그 개요와 역사를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개요

1901년 헨리 포드의 "헨리포드 컴퍼니"로 시작했으며 포드가 포드 모터 컴퍼니로 옮기자 헨리 릴런드는 파산위기에 

있던 "디트로이트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 캐딜락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1909년 GM에 인수되어 GM의

럭셔리 디비전이 되었다. 개다가 캐딜락을 GM에 판 이후 릴런드가 설립한 회사가 바로 현재 포드의 프리미엄 브랜드

인 링컨이다. 포드와 GM의 라이벌적 위치를 고려하던 엄청난 아이러니하다.

 

캐딜락이란 브랜드 이름은 1701년 미국 디트로이트시를 개척한 프랑스 귀족이자 탐험가인 르쉬외르 앙투한 드라 모스

카디악 경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캐딜락의 엠블럼 또한 캐딜락 가문의 문장을 따왔다.

 

역사

1902년에 "가변식 밸브 타이밍 1기통 엔진"을 장착한 캐딜락 최초의 프로토타입 모델를 750달러로 출시했다.

이 차량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25 MPG의 연비와 시속 30마일의 성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1갤런은 3.78 리터,

1마일은 약 1.6km 정도이므로 이를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로 풀어 말하면 약 10.6 km/L, 속도는 약 48km/h 정도 된다

이후 1903년 뉴욕모텨쇼에서 양산한 모텔 A를 선보였다. 모델 A는 1903년을 통틀어 2,497대가 제작되었고 상류층

의 큰 인기를 끌었다.

1905년 캐딜락은 4.9L 4기통 엔진을 장착해 성능을 향상시킨 모델 D를 출시했다. 유성 기어식 3단 변속기가 장착

되었고 제어식 스로틀, 그리고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크루즈 컨트롤이 장착되었다.

1907년에는 세계 최초로 250개 부품을 표준화해 부품 호환이 가능한 모델 S를 선보였고, 이 차는 1908년 영국

왕립자동차를클럽(RAC)으로부터 자동차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드와 트로피(The Dewar Trophy, 매년 뛰어난 

성능과 기술력을 선보인 자동차 업체에게 상을 수여함)를 수상했다.

 

1909년 헨리 릴런드는  캐딜락을 제너럴 모터스의 대표 브랜드로 성장시킨다는 조건으로 캐딜락 오토모빌 컴퍼니를

제너럴 모터스에 매각했다. 1910년에는 지붕과 창문 일체형 바디의 자동차를 선보였고, 1912년에는 세계 최초로

전자식 시동장치를 장착한 모델 30으로 두번째 드와 트로피를 수상했다. 1914년에 최초로 V타입 수랭식의 실린더

8개를 사용해 2,400RPM과 70마력의 성능을 낼 수 있는 "V8엔진(V8 Engine)"을 발표했고 1915년에 세계 최초

로 V8엔진의 실용화에 성공하며 대량생산체제로 생산체제를 전환했다.

 

1927년부터는 당시 경쟁자들이 개발에 몰두하던 V12 엔진 대신 V16 엔진의 개발을 시작, 1930년에 기존 캐딜락

V8 엔진보다 60% 이상 높은 토크를 1,200~ 1,500rpm이라는 낮은 회전수에서 내며 177마력의 힘을 내는 세계

최초의 V16 엔진 양산에 성공, 이 엔진을 집어넣은 V-16을 내놓는다.

 

1929년에 세계 최초로 자동차에 라디오를 장착해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오늘날 자동차 실내에서 누릴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기능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 무렵 캐딜락은 단순히 프리미엄 브랜드 가운데 최고봉의 지위를 지니는 것이 아닌, 자동차 태동기 세계의 기준이

되었고, 업계에서 그 탁월함과 정교함을 인정받았다.

 

1945~1973

이 시대의 캐딜락을 대표하는 차종은 엘도라도이다.

 

당시 인간을 다른 천체로 보낼 정도의 넘사벽의 호황을 누리던 미국의 경제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엘도라도의 

모델 변경 주기이다. 엘도라도는 1953년에 1세대가 나왔는데, (당시 다른 미국차들의 유행처럼) 1945년 바로 2세대가

출시되고 모델 주기가 길어봐야 4년 정도의 주기의 모델 변경 주기를 가졌다. 특히 이때 GM을 이끌던 총괄 수석 

디자이너인 할리 얼이 캐딜락의 디자인 전성기에 기여했고, 당대 야구계의 유명인사 랄프 카이너나 엘비스 프레슬리도

캐딜락을 높게 평가하곤 했다. 특히1959년형 캐딜락 라인업은 임페리얼의 1957년형 라인업에서 시작된 "포워드 룩"

의 특징인 길고 낮으며, 넓은 차체와 대형 테일핀을 주측으로 하는 디자인을 자신들만의 고유한 색으로 승화시켜 당대

최대 크기의 테일 핀, 길면섣도 낮고 넓은 차체, 분홍색외장색상 선택사양이 잘 알려져 당대 미국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가장 잘 알려진 캐딜락 차종 중 하나가 되었다.

 

1950년에는 캐딜락이 르망24시에 참가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담당자였던 브릭스 커닝햄은 시리즈 61 쿠페를 

바탕으로 제작된 차체에 캐딜락의 새로운 160마력 OHV 331ci V8 엔진을 탑재하여 참가했었는데 당시 섀시는

Frick-Tappett Motors가 포드 차량을 바탕으로 제작하여 (포딜락)이라고 불렀다. 이 차를 보고 당시 프랑스인들이

Le Monstre 라는 별칭을 붙여 유명해졌다. 캐딜락의 Le Mans 1950은 당시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캐딜락이 실제 스포츠카 레이스에 어울릴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시험 주행이었다. 결과적으로

르망24시에서 순정 캐딜락이 10위, Le Monstre가 주행 실수로 모래밭에 빠져 순위를 잃어 11위로 레이스를 마쳤다.

 

오일쇼크이후

 

오일 쇼크 이후 캐딜락 역시 스빌이나 1977년식 드 빌을 비롯해 다운사이징을 모토로 한 차종을 제작하기는 했으나,

쉐보레 카발리에를 배지 엔지니어링한 시마론은 역대급 망작으로 판정받고 쓸쓸히 퇴장했다. 시마론은 GM J 플랫폼

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플랫폼은 쉐보레와 뷰익, 올즈모빌, 폰티악, 오팰, 북스홀, 이스즈자동차 등 정말 당시의

GM 브랜드라면 다 둘러썼다. 그나마도 성능 같은 부분도 다른 형제차들과 차별화되어 있지 않았고, 결국은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까지 등장하고 말았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더 발전한 제품으로 승부하지 않고 비용절감으로 이윤을 내겠다는 GM의 재무부 출신 신규 경영진

의 뜻을 충실히 따른 총괄 수석디자이너 어빈 리비츠키의 지휘 아래, 배지 엔지니어링을 남용하거나 모든 차에 FF 

레이아웃을 도입하겠다는 당시 GM의 무리수적인 정책에 의해, 웅장한 후륜구동 레이아웃이나 이에 준하는 세로배치

전륜구동 레이아웃을 버리고 가로배치 전륜구동 레이아웃을 쓰는 등, 가면 갈수록 캐딜락의 고유한 디자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나마 피닌파리나와 공동 제작한 알랑테 컨버터블이 예외이기는 했으나 상업적으로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나머지 라인업은 폰티악이나 올즈모빌, 뷰익 차량들의 붕어빵에 불과해져갔다.

 

1991년에 등장한 10세대 엘도라도는 명가가 얼마나 처절하게 물락했는지의 척도였다. 지난 1세대부터 4세대까지의 

화려함의 극치도 5세대부터 이어온 고유의 디자인 헤리티지도 사리진, 과도한 프론트 오버행과 구식의 차체 비례는,

캐딜락이라는 브랜드와 그 대표적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줬다. 1980년대 중후반 전형적인 배지 

엔지니어링 차종이었던 9세대 엘도라도와 비교했을 때 동 시기 GM 계열사 내의 비슷한 퍼스널 럭셔리 카들과

구분되는 실내외 스타일링을 구축하여 상황이 낫긴 했으나, 결국은 1980년대 RV 열풍에 밀려 판매부진에 시달리다

10세대를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1903년에는 전륜구동이었던 플래그쉽 대형 세단이었던 캐딜락 식스티 스폐셜의 후속으로 후륜구동 캐딜락 폴리트우드

브로엄을 출시했으나, 미국차 특유의 크게 떨어지는 연비+당시 캐딜락 브랜드의 이미지 악화가 겹쳐서 판매량은 저조

했고 결국 출시 3년만인 1996년에 단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