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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 역사의 대해서 알아보자

by 유익한 내용 2024. 1. 1.

제너렐 모터스 산하 자동차 브랜드로, 포드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회사다.

본사는 미국 미시간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제너럴 모터스 소유의 마천루인 르네상스 센터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민국 시장에선 인천광역시 부평구에에 위차한 GM 한국사업장을 통해 개발 및 생산, 판매가 진행되고 있다.

 

역사

1911년, 윌리엄 크레이포 듀런트와 루이 세브럴레이가 합심하여 자동차 회사를 세운다. 사명은 당시 레이서로 명성이

높았던데다 발음하기 쉬웠던 세브럴레이의 이름에서 따와 "쉐보레 모터 컴퍼니"로 결정했고, 첫 차량으로 4.9L 6기통

엔진을ㄹ 얹은 고급 승용차 "클랙식 식스"를 선보였다. 클래식 식스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정교한 완성도와 좋은 주행

질감으로 호평을 받았고, 쉐보레는 창립과 동시에 시장에서 주목받는 브랜드로 올라선다. 자동차 산업이 본격적으로

태동한지 불과 20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창립자는 갈등을 겪는다. 사업적인 부분에 있어선 그 누구보다 탁월했던

듀런트가 포드 모댈T의 성공을 지켜보며 쉐보레 또한 보급형 차량에 주력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모터스포츠에 진심인

세브럴레이는 이러한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던 것. 하지만 어쩌어찌하여 1915년에 첫 4기통 모델인 H시리즈가 

양산됐고, 저렴한 가격으로 포드 모델T와 정면승부를 벌이며 결과적으로 듀런트의 선택이 쉐보레의 판매량 중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세브럴레이의 입장도 아예 무시받진 않았기에 1917년 첫 V8 엔진을 양산하는 등 고성능

포트폴리오도 꾸준히 확장시켜 나간다.

 

이후 회사는 듀런트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1918년에 GM과 합병한 뒤, 단숨에 미국 2위 자동차 메이커가 된다.

승용차 외에 트럭을 비롯한 다양한 차량들의 생산도 게시했고, 유럽과 일본을 비롯해 해외에도 적극적으로 공장을

세우며 이 때부터 글로벌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

 

GM에 인수된 이후엔 규막 큰 거대기업답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전설적인 디자이너 할리 얼을 영입하며 "개인화"

에도 처점을 맞췄는데, 모든 지갑과 모든 목적에 맞는 차 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회사 내에 차량의 미적 디자인을 

책임지는 "아트 앤 컬러"부서를 신설했으며, 세계 최초로 구매자가 차량의 색상을 선택 가능한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생산의 효율성만을 고려하며 디자인과 색상엔 신경을 쓰지 않았던 당시의 포드와 쉐보레의 격차를 큰 폭으로

벌렸고, 1927년엔 연간 생산량 100만대를 돌파하며 포드를 누르고 미국 1위 자동차 기업이 된다. 이 외에도 세계

최초로 상용 차량에 6기통 엔진을 도입, 최초의 독립 서스펜션 개발, 선구적인 스테이션 왜건 차량을 개발하는 등

기술적 성장을 이뤄낸다.

 

대공황 시기에도 이러한 행보도 꾸준했다. 경쟁사가 파산 위기에 몰리는 와중에도 세계 최초의 "전륜"독립 서스펜션

을 도입하는 기술적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며, 1935년엔 세계 최초의 SUV인 서버번을 선보이기에 이른다.

 

1950년엔 당시만 해도 극소수의 고급차에나 들어가던 자동변속기를 세계 최초로 보급형 차량에 장착해 운전의 

과정을 한층 쉽게 만들어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자동변속기가 주류로 자리잡는데에 크게 기여했으며, 전 세계적인

자동변속기 차량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고성능 차량의 개발에도 꾸준한 관심을 보였는데, 재규어의 스포츠카를 보고

의기투합하여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 보디를 비롯한 온갖 신기술을 떄려박는 최초의 대중형 스포츠카인 콜벳을 

내놓기도 했다. 몇 년 뒤엔 새로운 스몰블록 V8 엔진을 선보이는데, 우수한 성능과 간단한 구조에서 오는 견고한 

내구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수 많은 미국산 트럭과 스포츠카가 애용하고 있다. 이 시기 쉐보레는 NASCA나 

NHRA 프로스톡 경기에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특유의 미국적이고 화려한 디자인 덕에 차량 자체의 인기도 좋았다. 세계대전 직후 미국 전역에 흘러 넘쳤던 낙관주의

가 그대로 반영된 벨 에어나 임팔라 같은 명차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차량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영향력도 매우 컸다. 동세대 캐딜락 차량들과 함께 가장 "미국적인"

디자인의 대표적 예시로 꼽히기도 한다.

 

1960년대에 들어선 환경에 관심이 조금씩 높아지던 당시의 추세에 따라 인기 승용차였던 코베어를 바탕으로 한

순수전기차인 일렉트로베어를 선보였다. 초기 버전은 450V 아연 배터리와 67kw로 모터를 장착했으며, 후기

버전인 일렉트로베어2는 532V 아연 배터리와 85kw 모터를 장착해 65~129km의 1회 충전 주행거리를 선보였다.

1970년대에도 보잉사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꾸준한 전기차 개발에 나섰으며, GM그룹 차원에선 NASA의 요청에

따라 아폴로 15호, 16호, 17호의 임무에 사용된 윌면차를 제작하기도 했다.

 

국내 시장

제너럴 모터스의 대우자동차 인수 이후에야 쉐보레가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 아는 이들이 많지만 사실 의외로 한국

땅에 발을 들인지 오랜된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다.

 

오늘날 대한민국 시장에서 명실상부 1위 자동차 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모태인 현대그룹이 

창립되기도 한참 전인 1920년, 즉 일제강점기에 쉐보레는 이미 조선에 상륙했는데, GM의 일본 지부를 통해 수입

판매된 것이었다. 당시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GM이 일본에 조립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여서 도입이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식 수입 이전에도 조선에 쉐보레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닌데, 미국 대사나 광산 개발을 목적으로 온 외국인들이 

쉐보레를 들여와 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일단 진출 초기엔 현재와 달리 "쉐보레가 아닌 시보레"로 불리며 승용차부터 상용차에 이르기까지 나름 다양한

라인업을 도입했으며, 승용차의 겅우 포드보다도 비싼 값에 나름 고급차로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일본의 침공으로 중일 전쟁이 일어남에 따라 일본 정부는 GM의 현지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GM은 국내에서의

판매를 시작한지 10년을 조금 넘긴 시점인 1939년에 결국 쉐보레의 조선 철수를 단행했다.

 

몇년 뒤 미국의 원폭 투하와 함께 조선은 해방을 맞았고, 6.25 전쟁을 거치며 남/북이 분리, 미국에 우호적인 이승만

중심의 대한민국 정부가 남쪽에 들어서며 우방인 미국의 물건을 쓰자는 취지 하에 정부 차량이나 미국 차량으로 

쉐보레 차량이 대거 들어오게 된다. 전쟁 직후였던 터라 정식 판매는 아니었지만, 당시 서울 시내를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면 도로를 돌아다니는 차량 가운데 쉐보레 차량이 있는 것을 생각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개체 수가

상당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전 한국 영화들에서도 심심찮게 불 수 있다.

 

이러한 기조는 한동안 꾸준히 이어져 쉐보레 차량이 대한민국 대통령을 위한 의전차로도 사용되기에 이른다.

임기 동안 캐딜락, 올즈모빌 등 GM 계열 세단을 의전차로 적극 도입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1960년형 비스케인이

"업무용"으로 사용되어 현재까지도 새마을운동 등 국가재건운동의 상징적인 유물로 남아 있다.

청와대의 다목적 차량으론 서버번이 사용되기도 했다.

 

1972년 6월엔 저우언라이 4원칙에 의해 토요타와의 합작이 수포로 돌아간 신진자동차가 급한대로 GM과의 합작을

진행하며 GM코리아를 설립, 쉐보레가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된다. GM코리아는 국내 최초의 신차 발표회를 

열어가며 시보레 1700을 화려하게 선보였고, 생산 설비를 인천 부평에 위치한 신진자동차 공장에 유치해 쉐보레

브랜드 역사상 최초로 국내 생산을 진행했다. 전국 주요 33개 도시를 돌며 새 차 이벤트를 열기도 했으며, 당시로는

보기 드문 24개월 할부 프로그램과 월 1.081%의 국내 최저 할부이자율 등 국내 자동차 시장에 금융 프로그램을 

사실상 최초로 도입해 선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엔 라이트 버스를 비롯한 상용 차량까지 도입하며 라인업

다양화와 판매 확대에 나섰다. 다만 경쟁차량보다 소폭 높은 배기량을 비롯해 당시 국내 경제 사정에 맞지 않는

요소들이 발목을 잡았고, 신통치 않은 판매량 탓에 4년만에 새한자동차로 체제가 전환되며 한국 시장에서 또 물러난다

 

2000년대

이로부터 수십년 뒤인 2002년, IMF 외환위기 여파로 한국의 대우그룹이 몰락함에 따라 대우그룹 산하 대우자동차를

GM이 인수하게 된다. GM은 인수 직후 대우자동차를 지엠대우오토엔테크놀로지(GM대우)라는 새로운 법인으로

출범시켰고, 대우자동차가 양산/개발 중에 있던 일부 모델을 쉐보레 브랜드로 배지 엔지니어링하여 북미를 포함한

해외 시장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대우 계열 승용차의 쉐보레 브랜드 배지 엔지니어링은 주로 경형-소형 차량에 집중되었는데, 중형~대형 차량에

강했던 쉐보레에겐 경쟁력이 떨어지던 소형차 포토폴리오를 보강하기에 이들의 차량이 안성맞춤이었다.

계획은 나름 성공적이었고, 쉐보레 브랜드로 수출된 GM대우 차량들은 해외에서 준수한 판매 실적을 올렸다.

이에 GM은 한국의 소형차 개발 능력이 우수함을 인정하며 쉐보레의 차세대 소형차 개발과 생산을 GM대우에게

맡기게 된다.

 

그렇게 9년의 시간이 흘러가며 GM대우의 운영 체계는 어느덧 독립된 회사가 아닌 GM의 한국 지부로 흡수되는

방향으로 변해나갔고, 전략적인 판단 하에 GM은 과도기적 역할을 하던 GM대우 브랜드를 완전히 폐기. 2011년

1월 쉐보레를 한국 시장에 다시금 런칭한다. 이 때부터 대한민국 시장에서의 공식 표기도 일본식 영어 발음이었던

"시보레"에서 본토 발음에 좀 더 가까운 "쉐보레"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