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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벤츠의 역사와 변화를 알아보자

by 유익한 내용 2023. 12. 3.

독일의 프리미엄 자동차 제조사, 승용차 부문은 메르세데스-벤츠 그룹 산하에 있고 트럭버스 부문은 다임러 트럭

산하에 있다. 1966년에 마이바흐에 하늘 부문이 합병되어 메르세데스-벤츠는 자동차 생산 분야를 넘겨 항공기, 잠수함 등

하늘과 바다는 좌절했지만 해당 기종에 탑재되는 엔진들은 제작해왔고 여러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있다.

역사

1866년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를 만든 카를 벤츠의 의해 설립되었다. 본래 자신의 발명품의 실용성을 찾지 못하고 홍보가

되지 않아 사업으로 진행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으나, 아내인 베르타 벤츠가 남편의 발명품에 대한 기능을 확신하고

직접 나서서 100km의 거리를 시운전을 시행하기에 이르고, 이 사실이 널리 펄쳐지며 유명세를 타게되어 그대로

벤츠 앤드 씨에 (Benz Cie)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한편, 1890년에는 최초의 오토바이와 4륜 자동차를 만든 고틀리프 다임러빌헬름 마이바흐가 다임러 모토렌

게젤샤프트 (Daimler Motoren Gesellschaft, 약칭 DMG)를 설립했다. 원래는 서로 경쟁중이던 벤츠와 다임러,

이 두 자동차회사는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의 여파로 경영 위기에 몰리게 되자, 1923년 무렵부터 상호협정을

맺어 디자인과 생산등을 공동으로 협력하되 브랜드는 각각 유지하는 식으로 협업을 하다가 결국 1926년에는 완전히

합병했다. 이렇게 설립된 회사가 바로 다임러-벤츠 AG이다. 즉 현대 내연기관 자동차의 시작과 역사를 같이 하는 대형

회사이다. 고틀리프 다임러빌헬름 마이바흐, 카를 벤츠 등 설립자들의 이름은 산하 브랜드 명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카를 벤츠는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인 벤츠 페이던트-모터바겐을 발명한 사람으로, 아내인 베르타 벤츠는 이 자동차를

타고 최초의 장거리 운행을 행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사명 중 메르세데스는 에밀 옐리네크의 딸인 메르세데스 옐리

네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에밀 옐리네크는 다임러 모터 코퍼레이션의 딜러와 레이싱 드라이버이면서 자산가였다.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 출신이었던 에밀 옐리네크는 1896년 다임러 모터 코퍼레이션의 자동차를 주문하면서관계를

맺었고 1898년부터 높은 마력을 지닌 자동차를 전문적으로 주문하기 시작했다. 이 자동차들은 전설의엔진 제작자였던

빌헬름 마이바흐가 만들었으며, 이 자동차들은 1901년 프랑스 니스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이 즈음부터 옐리네크는 "에밀 옐리네크 메르세데스"라는 자신의 딸의 이름을 붙인 예명을 사용했으며 이와 동시에 마이바흐

만든 엔진으로 출전한 자동차를 메르세데스라 칭했다.

 

다만 에밀 옐리네크의 말로는 별로 좋지 않았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자동차가 잘 팔려나가면서 그야말로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 다임러 모터 코퍼레이션 회장과의 갈등으로 다임러 자동차 판매 저격을 박탈

당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진 뒤에는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프랑스 내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결국 스위스에서 초라한

말로를 보내며 생을 마감했다. 딸인 메르세데스 옐리네크도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직전까지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전쟁 후에는 빈민층으로 굴러떨어져 가난뱅이로서의 삶을 살다가 결국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의 다른자동차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의 강제 노역으로 무기

군수품을 생산해 납품한 전범기업이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Bf109의 엔진을 비롯해 많은 군용기의 엔진은

물론 히틀러와 나치정부 관용차메르세데스-벤츠 770을 7대를 특수제작해서 갖다 바쳤다.

 

그리고 전차 생산에서도 이름을 남겼는데, 주력전차였던 1호 전차2호 전차, 3호 전차의 설계와 생산 모두 맡았고

5호 전차 판터 사업에서 VK 30.01(DB)를 내놨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VK 30.02(MAN)에게 밀려 쓴맛을 봤다.

하지만 판털를 만들때 오히려 MAN보다 메르세데스-벤츠에서 생산한 판터가 더 많았다. 그리고 판터의 파생형인 

야크트판터를 만들떄 벤츠에서 주도해서 개발했는데, 정작 벤츠는 G형을 만드느라 여유가 없어 타 제작사에 위탁해서

생산했다. 당시 최대 전차였던 8호 전차 마우스의 엔진도 메르세데스-벤츠에서 만들었는데, 가솔린 엔진은 항공기용

DB603 엔진을 개조한 것이고 디젤 엔진은 소형 선박에 쓰이는 것을 역시나 마우스에 맞게 개조했다. 하지만 둘다

연비가 최악이라 결국 마우스 사업은 접었다. 이로 인해 당시 연합 군정에 의해 메르세데스-벤츠는 약 1년 6개월간

강제로 폐업되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한동안 다른 독일 전범기업들과 같이 강제 노역에 대해 전쟁의 불행한 결과이며 나치의 지시를 

따랐을뿐이라고 주장하다가 1988년부터 서독 적십자를 통해 강제 노역 피해자들을 위해 1200만 달러를 기부하면서

입장을 바꿨다. 이후 2000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기억 ,책임과 미래 재단" 이라는 강제 노역 피해자 배상 재단

을 설치했는데 메르세데스-벤츠는 다른 독일 전범기업들과 같이 이곳에 기부하기도 했다. 특히 벤츠의 경우에는 전범 

피해자들의 후손이 독일에서 공부하는 경우 모든 소요 경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슈루트가르트에 소재한 벤츠 박물관

에는 당시 전범 행위에 대한 별도의 반성이 관이 있으며, 벤츠에서 발간하는 공식 자료집에도 당시의 전범 행위에 

대해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현재도 미국 메르세데스-벤츠 딜러십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특별 할인을

해준다.

 

흑역사

대표적으로 르망 레이스에서도 암울한 과거가 있다. 1955년 6월 르망 대회 중 상대차량과 충돌 후 만원인 관람석으로

날아간 사건이 있었다. 차가 폭발해 사망자만 85명이나 나온 이른바. "르망의 비극"이 발생해 한때 모든 모터스포츠

참가를 포기했다. 1988년 이후 르망 24시 경주에 자우버 & 메르세데스-벤츠 라는 합작 워크스 팀으로 다시 레이싱

계에 복귀를 시작했으나 르망과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999년 대형 사고가 한번 더 발생했다.

이 사고 차량의 드라이버는 DTM, 르망, 포뮬러 시리즈에서 활동한 피터 덤브렉, 또한 후에 포뮬러 1에서도 활동하게

되는 마크 웨버는  비록 영상으로 찍히지는 않았지만 이 사고를 2번이나 겪였다. 설계결함으로 인해 사고가 났음을

확인한(공력설계에 문제가 있어서 특정상황에서 차가 비행기 날개처럼 양력을 받고 위로 뜨는 경향을 보였다고 한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지금까지 르망에 출전하지 않고 있다. 현재에 이르러서 2010년부터 공식적으로 포뮬러 1에 참가

하며 2014년부터 F1 역사상 최초로 7년 연속 드라이버 & 8년 연속 제조사 부문 챔피언을 달성했다.

 

르망에는 출전하지 않고 있지만 F1에는 1955년부터 엔진을 게속 공급해 왔고, 2010년 부터는 맥라렌의 엔진 공급 

제조사뿐만이 아닌,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팀으로 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참가한지 4년만인 2014년에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제조사 부문, 드라이버 부문 시즌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2020년까지 쭉 월드 챔피언을 따내며

넘사벽 기량을 보여주면서 제조사 부문과 드라이버 부문 시즌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기타

엠블럼은 벤츠 앤드 씨에(Benz & Cie) 의 월계수 문양 테두리의 가운데에 다임러 모토렌 게젤샤프트(Daimler Motor

en Gesellschaft, DMG)의 삼각별을 집어넣은 형태이다. 땅, 바다, 하늘 3개 부문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고있다.